룻과 같은 은혜를 누리기 위해
우리가 해야할 것이 무엇일까요?
첫째, 은혜의 자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어디에 가서 이삭을 주워야 할지도 모르는 이방 땅에서
그래도 시어머니를 봉양해야 하기에 룻은 나섭니다.
그런데, 갈 바를 전혀 알지 못하고 믿음으로 나선
아브라함처럼! 그렇게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모르고 길을 나섰지만 룻은 어디를 가게 되고,
누구를 만나게 됩니까?
“우연히” 보아스의 밭에 이르게 되고,
그리고 룻은 “마침” 보아스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룻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당황스러운 은혜를 누리게 됩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가능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룻이 그 자리에 나아갔기 때문입니다.
보아스의 은혜를 누릴 수 있는 밭으로 나아갔고,
그리고 그 밭에서 그 누구보다 열심히 이삭을 주웠기에
“우연히!” 그리고 “마침”의 은혜를
누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은혜는 공짜로 주어지는 선물이 맞습니다.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100% 하나님의 주권으로
주어지는 것이 맞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밥을 먹기 싫다는 아이의 입을 강제로 벌려
밥을 먹일 수 없듯이
하나님의 은혜 역시 입을 벌려야!
은혜의 자리로 나아가야 누릴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룻은 결코 은혜를 기대하고 밭에 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보아스를 만나려고 열심히
이삭을 주운 것도 아닙니다.
나아갔더니! 그리고 열심히 시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주어진 자리에서 해야 할 일을 했더니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은혜를 부어 주신 것입니다.
그 자리를 은혜의 자리로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각자에게 주어진 자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가 때로는 피하고 싶고,
힘든 곳일 수도 있습니다.
룻도 얼마나 낯설고, 힘들어 가기 싫었겠습니까?
하지만,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를 지켰습니다.
그럴 때 우연히 그리고 마침의 은혜를 누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둘째, 기꺼이 헌신을 선택해야 합니다.
왜 나에게 은혜를 베푸냐는 보아스를 향한 룻의 질문에
보아스는 ‘네가 시어머니인 나오미에게 한 헌신을 알고 있다.
온 동네에 네 칭찬이 자자하다.’라고 답합니다.
그런데, 룻은 보아스의 칭찬을 듣고 기분이 어땠을까요?
물론 좋았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민망했을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룻은 결코 누군가의 칭찬을 듣기 위해!
또한 보상을 바라며 시어머니를 따라 베들레헴에
온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룻은 나오미를 통해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래서 룻은 나오미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선택했기에 기꺼이
나오미를 따라 나섰던 것입니다.
룻의 행동은 결코 칭찬을 바라는 헌신이 아닌
하나님을 믿는 자로서 또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받은 자로서의 당연한 반응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참 안타까운 것은 아주 많은 사람이
기꺼이 하나님께 나의 삶을 거룩한 산 제물로
내어 드리는 것이 아니라! 칭찬을 바라며
또한 보상을 바라며 “투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이 만큼 드리면 이~만큼으로 갚아주시겠지?
30, 60, 100배로 축복해 주시겠지라고 생각하며
‘내 시간’을 ‘내 돈’을 ‘내 노력’을 투자한다는 것입니다.
룻은 결코 투자하지 않았습니다. 기꺼이! 당연히!
기쁨으로 헌신! 자신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룻의 헌신을 받으셨고,
그의 삶을 놀라운 은혜 가운데 인도해 가셨던 것입니다.
헌신! 즉 내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믿는 자의 당연한 반응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기꺼이 헌신을 선택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굳이 주시지 않으셔도 되는데, 칭찬과 격려와 위로라는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룻이라는 이방 여인이 다윗 왕의 증조 할머니가 되고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에 기록되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은혜를 누리게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오늘 하루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묵상하며
은혜의 자리고 나아가시길 축복합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매 순간 기꺼이 헌신을 선택하는
자가 되실 수 있길 축복합니다.
그래서 오늘 룻이 누렸던 당황스러울 정도로 놀라운 은혜!
우연히의 은혜! 마침의 은혜를 누리실 수 있길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