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우리가 봉독한 본문의 이야기는 아주 복잡한 문제에
처한 다윗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압살롬이 자신의 친누이를 겁탈하여 욕을 보인
이복 형제 암논을 죽이고 그술로 도망갔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삼 년이라는 시간이 흐르고
오늘 우리가 봉독한 본문의 말씀의 상황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큰 잘못을 한 자라고 해도 자식을 이기는
부모가 어디 있습니까? 다윗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삼 년 동안이나 보지 못하자 압살롬을 그리워했습니다.
이런 왕의 마음을 알아챈 충복 요압이 한 가지
계획을 세웁니다.
드고아의 한 여인을 택해 그에게 할 말을 알려줍니다.
자기에게 두 아들이 있었는데, 어느 날 서로 싸워
한 아들이 다른 아들을 쳐죽였는데, 이에 온 족속이
일어나 아들을 쳐 죽인 다른 아들을 잡아 죽이려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한 아들을 잃은 슬픔도 잊기 전에
졸지에 남아 있는 아들 마저 잃을 상황이 되었으니
왕이 도와달라는 부탁의 말을 전하는 것입니다.
이 여인의 하소연을 들은 다윗은 절대로 그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겠다고 장담을 합니다.
그렇게 남아 있는 아들의 머리카락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도록 지켜주겠다는 다윗의 확실한 약속을 받고 난
후에야 드고아 여인은 본래 하고 싶은 이야기를 꺼냅니다.
남의 아들은 그렇게 지켜주겠다고 호언장담을 하면서!
왜 왕께서는 내쫓긴 자! 즉, 압살롬을 집으로
돌아오게 하지 않아 그 아들마저 잃으려 하십니까?
라고 반문하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마치 나단이 밧세바를 범한 다윗에게
애지중지 키우던 그 한 마리 양을 가난한 자로부터
빼앗은 자가 바로 당신입니다.
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구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야기의 흐름도 나단의 지적에
자신의 잘못을 깨달은 다윗이 하나님 앞에 회개한 것처럼!
드고아의 이야기에 다윗은 자신의 잘못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내일 본문을 통해 다시 확인하게 될텐데,
압살롬을 그가 도망쳐 머물고 있는
그술 땅에서 불러들입니다.
그런데! 나단 선지자가 다윗의 잘못을 지적한 이야기와
요압이 드고아의 여인을 통해 다윗으로 하여금
압살롬을 돌아오게 하기 위한 이 이야기는
방법는 유사했지만! 그 목적은 완전히 달랐습니다.
나단이 다윗의 잘못을 지적한 것은
다윗의 근본적인 잘못을 지적하여 회개를 촉구하기 위한!
그래서 하나님과의 근본적인 죄의 문제를 해결 받기 위한
목숨을 내건 지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의 내용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근본적인 문제가 아닌 눈에 보이는 문제만
어떻게든 해결해 보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도 이렇게 전합니다. 20절 상반절입니다.
“이는 왕의 종 요압이 이 일의 형편을 바꾸려
하여 이렇게 함이니이다”
그렇습니다. 요압은 이 일의 형편만 바꾸려고 했습니다.
눈에 보이는 상황만 바꾸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 문제는 형편을 바꾸면 해결된 문제가 아니라!
잘못된 것을 바로 잡을 때 해결될 수 있는
문제라는 사실을 요압은 전혀 몰랐고!
심지어 다윗도 압살롬도 몰랐고!
바로 잡을 그 어떤 의지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불편하기 때문입니다.
고통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그냥 시간이 해결해 주길 기다리며
겨우 형편만 바꾸는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후의 말씀을 통해 살펴보겠지만,
이러한 요압의 행동은
결코 다윗과 압살롬의 관계를 개선시키지 못했고!
오히려 더욱 악화시켜 압살롬이 다윗을 반역하려는
마음만 더 확고하게 만들어 버리는 결과를 낳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것은
결코 아픔 없이는 되지 않습니다.
반대로 아픔을 피하려고 꼼수를 부린다면
결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을 보내셨습니까?
왜 하나뿐인 아들을 십자기에서 죽게 하셨습니까?
우리의 죄를 잠시 덮어주시는 것이 아니라
완전해 해결해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님께 그 모든
고통과 아픔을 직접 담당하게 하셨습니다.
우리의 삶을 모든 문제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모든 문제들을 근본적으로 살펴보면
그 원인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습니까?
바로 죄 아닙니까?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내 뜻대로! 내 생각대로 살려고 하는 마음에서부터
문제가 시작되는 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겪는 문제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아픔이 따릅니다.
고통이 따릅니다.
불편함이 따릅니다.
때로는 손해도 봐야 합니다.
이 시간 순간의 어려움만을 해결하기 위해
순간의 불편한 상황만을 피하기 위해
오늘 본문의 요압처럼 지극히 인간적인 방법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지혜를 구해서
아프더라도! 불편하더라고!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택하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길 바랍니다.
그 방법이 오래 걸리더라도
그 방법이 복잡하더라도
가장 완벽한 해결 방법이라는 사실을 믿음으로
결단하는 시간이 될 수 있길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