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우리가 봉독한 본문은 아버지의 무관심에
광기 어린 행동을 하는 한 사람을 만날 수 있습니다.
바로 자신의 형제 암논을 죽이고 그술로 도망쳐
3년 동안 머물다 다시 돌아온 압살롬입니다.
어제 본문에 의하면 다윗은 분명히 압살롬을
그리워했다고 합니다. 당연합니다.
아들을 3년 동안 보지 못했는데,
그리워하지 않을 아비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다윗은 그리운 아들이 다시 돌아왔지만
정작 아들의 얼굴은 보지 않습니다.
무려 2년 동안 지근 거리에 있는 아들
압살롬을 다윗은 철저히 외면했습니다.
그러니 압살롬이 어떤 생각이 들었겠습니까?
다시 예루살렘에 돌아올 때까지만 해도
가자마자 아버지를 뵈면! 자신의 잘못에 대한
용서를 구해야겠다는 생각은 진작에 다 사라지고
차라리 아버지를 밀어내고 내가 왕이 되어야겠다는
배신의 싹이 마음 속에 터 오르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압살롬의 마음에 광기를 심어 준 것은!
그래서 왕의 자리를 탐내어 아버지를 죽이고
왕의 자리에 오르려는 괴물로 만들어 버린 장본인은
다름 아닌 아버지 다윗이었던 것입니다.
어제, 오늘 14장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한 가지 특이하면서 이해가 되지 않는 점이 있었습니다.
어제 본문에도 보면 다윗은 압살롬을 그리워했지만
정작 다윗은 압살롬을 다시 만날 아무런 계획이나
행동을 하지 않습니다. 요압이 계략을 세우자
그제야 겨우 압살롬을 데려옵니다.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2년 동안 보지 않았던 아들인데,
요압이 요청하자 너무 쉽게 압살롬을 만납니다.
마치 다윗이 요압에 의해 조종을 당하는 것 같은!
요압의 아바타처럼 행동을 합니다.
다윗이 왕이 아니라 요압이 왕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그런데! 원래 다윗은 어떤 자였습니까?
다윗은 목동시절부터 왕이 되는 그 순간까지
어떤 삶을 살았습니까?
철저히 하나님에 의해 조종 당하는 삶!
오직 하나님의 아바타로 살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지금은 그의 삶이 요압에 의해
요압의 계획에 의해서 지극히 수동적인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더 이상 다윗이
하나님의 의해 조종당하는 삶이
하나님의 아바타로 살아가고 있는 삶이 아니라
철저히 사람에 의해서
사람의 지혜를 의지해서 살아가는 삶이라는
것을 증명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랑하는 아들 암논을 잃을 뿐만 아니라
사랑하는 아들 압살롬을 괴물로 만들어 버리는!
그래서 자신을 배신하게 하는 괴물로 만들어
버리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지혜를 구했어야 했습니다.
자신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 앞에
어떻게 해야 하는 지 다시 하나님 앞에 섰어야 했습니다.
요압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조종 당하는 삶!
하나님의 아바타로서의 삶을 다시 살아야 했습니다.
물론 압살롬은 용서 받지 못할 죄를 저질렀습니다.
살인을 저질렀으니 죽임을 당해야 마땅한 자였습니다.
하지만 그런 압살롬에게
죄를 누구보다 미워하시는 하나님의 공의를
그리고 허다한 죄를 덮고도 남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가장 잘 전할 수 있는 자가
누구겠습니까?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죄
밧세바를 범하고 그 죄를 가리기 위해 충성된 용사
우리아를 죽이는 죄를 하나님으로부터 용서함
받았던 다윗 자신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다윗은 압살롬에게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전하기는 커녕! 그의 마음에 분노와 증오만
쌓이게 할 뿐 아니라! 아버지를 적으로 생각하는
괴물을 만들어 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의 다음 세대
우리의 자녀들을 생각해 보면
압살롬의 괴물로 만든 다윗이 바로 우리 아닙니까?
우리 우리의 다음 세대들에게
바른 믿음을,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는 기도를
온전히 가르치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에게 내가 경험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전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이 믿음을 버릴 뿐 아니라
믿음보다 돈을, 명예를, 권력을
추구하는 삶을 살도록 만들어 버린 것이
바로 우리 아닙니까?
압살롬은 다윗의 아들 압살롬 한 명으로 충분합니다.
그리고 압살롬에 의해 받는 고통은 다윗 한 명이
겪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의 다윗을 반면교사로 삼아
더 이상 우리의 자녀들이
압살롬이 되지 않도록, 괴물이 되지 않도록!
우리가 먼저 철저히 하나님 앞에 서야 합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우리의 다음 세대에게
내가 누린! 우리가 누려 지금 이 자리에 서게 하신!
하나님의 공의를!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히 전하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길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