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과 세 친구의 대화는 엘리바스에 이어 빌닷과으로
이어집니다. 큰 맥락에서 대화의 주제는 엘리바스와 같습니다.
빌닷 역시 욥을 향해 회개하라고 다그칩니다.
결국 빌닷 역시 인과응보의 원칙에 따라
욥을 정죄하고 있는 것입니다.
욥은 계속해서 이들의 주장을 납득할 수 없었습니다.
심지어 빌닷이 자식을 들먹이며 죄를 운운하는 대목에서는
상처를 넘어 욥을 분노하게 만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여전히 욥은 자신이 무고하게 하나님께로부터
고통을 당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아니 오히려 차라리 하나님께서 인과응보의 원칙에 따라
일하신다면 더 좋았을 것을! 자신이 보기에 하나님은
전혀 보응의 원칙과는 상관없이 자신의 마음대로 행하시는
분처럼 보입니다. 공의와 정의와는 전혀 상관없이
오히려 악인 더 득세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러한 세상 속에서 욥은 그 원인은 다르지만!
전도서의 전도자와 같은 결론을 내립니다.
“내가 정죄하심을 당할진대 어찌 헛되이 수고하리이까”
어차피 자신이 의롭게 살려고 노력해도 결국 하나님은
자신을 정죄하고 다시 더러운 시궁창에 던져버릴 것이니
그래서 다시 감당할 수 없는 고난 속으로 나를 쳐박아 버릴
것이니 이런 세상에 무슨 미련을 두어야 하나?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살아갈 생각을 갖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이러한 세상에 대해서 의문을 가졌습니다.
하나님은 선하신데, 왜 이 세상은 악한가?
왜 의인은 고통 당하며 악인이 득세하는가?
이러한 의문은 결국 믿는 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은 이 세상에
관심이 없는 분이다!라는 결론으로 이끌었습니다.
그래서 욥도 침묵하시는 하나님을 향해! 이렇게 한탄합니다.
“우리 사이에 손을 얹을 판결자도 없구나!”
이 세상에 내 편에 서줄 한 사람!
나를 대변해서 하나님께 말해 줄 그 한 사람이 없다고!
그 한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하소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로 하나님은 이 세상에 무관심하십니까?
악이 득세하고, 의인이 고통 당하도록 버려두시는 분이십니까?
정말로 이 세상에 내 편이 아무도 없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게 욥이 애타게 찾던 그 중재자!
우리 사이! 즉, 인간과 하나님 사이를 연결해 줄!
다리를 놓아 줄 중보자가 되기 위해서!
내 편이 되어주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인과응보의 원칙을 깨고! 아무런 죄도 없으신
분이!죄 값을 다 치루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혹시 너무 억울해서! 고통에 몸서리치고 계십니까?
내가 왜 이런 고난을 당해야 하는지
너무 억울해서 잠이 오지 않습니까?
그래서 욥처럼 판결자, 중재자를 찾고 계십니까?
내 편이 되어줄 한 사람을 간절히 찾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이제 고개를 들어 십자가에 달리신
그렇게 우리의 중재자로 오신! 영원히 내 편이 되어주시기
위해 오신!하나님의 끝없는 사랑의 증거로 오신
예수님을 바라볼 수 있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