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함께 봉독한 본문의 말씀은 처음 욥과의 대화에
등장한 엘리바스가 다시 등장하여 대화하는 장면입니다.
이러한 대화는 총 3번에 걸쳐 이루어지는데,
큰 맥락으로 보면 같은 주제가 반복되기에
대화의 진전이 전혀 없는 이야기처럼 느껴집니다.
그렇다면, 왜 같은 주제로 대화하는 장면이 반복해서
등장합니까? 일체 다른 사람의 말을 귀 담아 듣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냥 귀를 닫고 자기 하고 싶은 말만 떠들어
대기 때문입니다. 욥의 친구들은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서 인신공격도 서슴지 않는다.
오늘 엘리바스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이 통하지 않으니
나이라는 권위로 짓누르려 합니다. 그런데, 이도 통하지
않을 것 같으니 자신의 경험한 것을 의존하여 말합니다.
뿐만아니라, 조상으로부터 전해 내려온 지혜에 근거하여
욥에게 충고합니다. 그들의 삶 속에서 또 하나의 규범으로
자리 잡은 전통을 근거 삼아 욥을 정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내가 경험한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여!
그리고 내가 믿는 전통만 옳다고 주장하며!
남의 말에는 전혀 귀 기울이지 않고 나만 옳다고 윽박지르고
있는 것이 바로 욥의 세 친구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의 대화는 아무런 진전 없이 이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처음부터 이들이 이런 모습이 아니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욥의 세 친구는 욥의 너무나 참혹한
모습에! 할 말을 잃고 일주일간 그 자리에서 금식하며
함께 아파했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욥이 지금 처한 고통과 고난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기 위해 어렵게 한 마디 내뱉었습니다.
그것이 이들 대화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위로, 공감, 회복! 이런 것은 오간대 없이!
그냥 자신의 주장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말 잔치!
남의 상처와 아픔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오직 이기기 위한 싸움이 되어 버렸습니다.
아니 한 발 더 나아가 너를 이겨야 내가 옳게 되는!
네가 죄인이 되어야! 내가 의인이 되는 싸움이 된 것입니다.
그러니 이들의 대화는 가면 갈수록 더 과격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의 대화를 묵상하면 할수록! 욥의 친구의 모습이
지금의 나의 모습처럼 느껴지지 않습니까?
왜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이 그리고 교회가 아무런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고 있나요? 남의 아픔에! 공감은커녕
가르치고, 정죄하기 바쁘고 판단하여 겁주기 바쁜 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의 모습이기 때문 아닙니까?
어떤 목사님이 욥기를 묵상하며 욥의 세 친구의 가장 큰 잘못은
다른 것이 아니라 “말을 너무 많이 하는 것”이라는 지적이
참으로 공감이 되었습니다.
우리 믿는 자들도! 서로를 향해 또 세상을 향해
너무 말이 많은 것 아닙니까? 아니 말만 많은 것 아닙니까?
오늘 엘리바스와 욥의 대화를 통해
내 자신을 돌아볼 수 있길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가 어떤 모습이 되어야 하는지 깊이
묵상하며 교회를 위해 한국의 모든 교회를 위해 기도하는
우리가 될 수 있길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