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나귀를 통해 볼 수 있는 주님의 은혜는 무엇입니까?
첫째,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은혜입니다.
4-6절에 제자들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일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을 경험합니다.
어떻게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이루어질 수 있습니까?
그 이유는 주님이 세상의 창조주요,
통치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말하고도 신실하지 못해서,
또는 능력이 없어서 이루지 못하는 일이 많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신실하시고 또한 전능자이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말씀하신 것은 반드시 이루십니다.
우리가 그분의 말씀과 언약을
삶의 기반으로 삼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시련과 고난 속에서도
오직 그 말씀의 절대성과 확실성을 믿기에
오늘도 세상을 이기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말씀하신 대로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그 말씀을 믿으며 담대히
믿음의 길로 나아가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은혜를
풍성히 누릴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둘째, 주님께서 함께하시는 은혜입니다.
7절에 예수님은 데려온 어린 나귀 위에 걸터앉으셨습니다.
처음 사람을 태워본 나귀가
중심을 못 잡고 쓰러질 수도 있고
불편함에 예수님을 떨어뜨리려고 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불편함을 감수하고
나귀에게 몸을 맡기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했을 때도
주님은 기꺼이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나귀 새끼에 앉으신 것처럼 불편하지만
사랑하기에 불편함을 감수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와 항상 함께하여 주십니다.
함께 하실 뿐만 아니라 주님은 떠나지 않으시고
평생 함께하시고 우릴 인도하십니다.
헛된 바램과 욕심들로 요동치는 우리 안에,
주님께서 함께하셔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길로,
믿음의 길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그렇기에 우리 안에 주님이 머무시는 것은
너무나도 큰 은혜입니다.
지금 그 은혜를 누리고 계십니까?
그 주님의 함께하심에 늘 감사하며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셋째, 주님의 영광에 동참하는 은혜입니다.
8절에 나귀를 탄 예수님께서 지나시는 길에
사람들은 자신들의 겉옷을 깔았습니다.
만일 나귀 혼자 사람들의 옷을 밟고 갔다면
사람들은 분노하여 나귀를 때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예수님을 메시야로 환영할 때
어린 나귀도 덩달아 환영했습니다.(9~10절)
어린 나귀가 어디서 이런 대접을 받겠습니까?
무겁고 불편하지만,
예수님을 모셨기에 받을 수 있는 대접입니다.
우리도 주님의 영광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길은 어린 나귀처럼
무겁고 불편한 길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주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한다고 말씀합니다.(롬8:17).
흔히 고난은 위장된 축복이라고도 말합니다.
주와 함께 고난받은 사람만이
주님과 동행하며 영광을 맛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
주님의 영광에 동참하는 은혜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고난 끝에 있는 주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기쁨과 감사함으로 이 은혜를 감당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