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묵상
6월 19일 오늘의 묵상
2024-06-19
설교일시
2024. 6. 19
설교본문
사도행전 22:12~29
설교자
최다니엘 목사

주님을 만난 자가 가져야 할 모습은 무엇입니까?

첫째, 원수 관계를 깨트려야 합니다.

사울은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친” 존재였습니다.(행 9:13)

그리고 아나니아도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13절에 아나니아가

그런 사울을 찾아와 형제라고 부릅니다.

이 얼마나 친근한 부름입니까?

이것이 바로 주님을 만난 자가 갖는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은 모든 원수 관계,

높은 담보다도 더 높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가로막힌 장벽을 허물었습니다.

이것을 알았기에 아나니아도 먼저 찾아가서

형제라고 불러 주고 안수해 주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누군가가 나에게 상처를 입히고, 섭섭하게 하면

어떻게 해서든지 원수를 갚으려고 하지는 않습니까?

이것은 주님을 만난 자가 가질, 참 신앙인의 모습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사랑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께 받은 사랑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원수 같은 관계를 허물고

사랑으로 화목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보고 들은 대로 증거해야 합니다.

15절은 주님께서 왜 바울에게 나타나시고

음성을 들려주셨는지에 대한 답을 주고 있습니다.

바울이 보고 들은 것을 증거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만난다는 것도 같은 의미가 있습니다.

주님을 만날 때, 왜 감동과 감격을 주십니까?

그 감격을 안고 나가 증거하라는 것입니다.

15절에 증인을 뜻하는 헬라어 ‘마르튀스'는

후에 *순교자'라는 뜻이 되었습니다.

많은 성도가 이 감격을 안고 증거하다가

순교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주님을 증거하는 사명은

목숨을 바쳐 꼭 이뤄가야 합니다.

이것은 축소될 수도 없고, 개정할 수도 없고

외면할 수 없는 절대적인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구원의 은혜를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구원의 은혜와 감격만을 누리려는

안일한 의식이 너무 넓게 퍼져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이 사명 불감증을

떨치고 일어나야 합니다.

우리가 보고 들은 대로 주님을

힘써 전하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축복합니다.

 

셋째, 주저하지 말고 결단해야 합니다.

16절에 아나니아는 바울을 향해

“왜 주저하느냐 일어나 주의 이름을 불러 침례를 받고

너의 죄를 씻으라”고 합니다.

관망하는 바울을 하나님께서는

아나니아를 통해 책망하십니다.

“왜 주저하느냐?” 신앙의 결단을 촉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신앙적인 결단에서는 계산하는 것이 아님을 말씀합니다.

그런데도 사단은 우리에게 계산기를 들이밀어

세월만 허비하게 만듭니다.

지금 시대도 사단은 박해와 반대에서

지연과 관망의 자세로 계산기를 들이밉니다.

도구는 다르지만 결국 결단하지 못하게 하고

미루게 하는 것입니다.

안 한다고는 하지는 않지만, “다음에” 하겠다고 합니다.

이러한 성도들을 향해

하나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시겠습니까?

“왜 주저하느냐?"

질책과 서운함이 담긴 이 말씀에

귀를 기울이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결단의 순간에 망설이지 마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하나님의 명령에,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뜻 앞에

즉시 순종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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