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본문 시편 기자는
소망보다는 절망
더 나은 내일보다는 더 나쁜 내일 속에서
고통스러워하고 있습니다.
“나의 생명은 스올에 가까웠사오니”
스올은 죽음을 의미합니다.
시편의 저자는 고통 가운데 삶보다는 죽음을
생각합니다. 그래서 시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죽임을 당하여 무덤에 누운 자 같으니이다”
그리고 그렇게 시인이 죽음을 생각할 수 밖에 없는
이유를 6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깊은 웅덩이와 어둡고 음침한 곳에 두셨사오니”
또 8절입니다.
“나는 갇혀서 나갈 수 없게 되었나이다”
시인이 처한 절망은 육신의 문제일 수도 있고,
관계의 문제, 경제적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이 문제가 나아질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지금 시인이 처한 상황은
마치 빛 한 줄기 들어오지 않는 독방에 홀로 갇혀
언제 끝날지 모르는 수감 생활을 하고 있는
죄수와도 같은 모습입니다.
또는 고칠 수 없는 불치병에 걸려
이런 저런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해도 전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아 이제는 다 포기하고
홀로 요양병원에 누워있는 환자와도 같은 모습입니다.
이제는 다 끝났다고!
삶을 포기한다 할지라도 그 누구도
뭐라 할 수 없는 완벽한 어둠!
완벽한 절망 가운데 시인은 서 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우리 성도님들이라면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끊임없는 고통 속에서!
나아질 기미가 없어 보이는 질병 속에서!
상황은 더 악화 되어 가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 속에서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그렇다면! 오늘 시편의 시인은 그 가운데에서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여호와 내 구원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야로 주 앞에서 부르짖었사오니”
지금 시인은 “주야”로 하나님 앞에
부르짖고 있습니다.
“곤란으로 말미암아 내 눈이 쇠하였사오니
여호와여 내가 매일 주를 부르며
주를 향하여 나의 두 손을 들었나이다”
고통 가운데 눈이 쇠할 정도가 되었으나
시인은 그럼에도 시인은 매일 주님을 찾습니다.
그렇습니다. 시인은 파도와 같이 밀려오는
고통과 슬픔과 외로움에 맞서!
“주야로” “매일” “밤이 새도록”
하나님을 찾습니다.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지금 내가 처한 상황을 이해하실 분이
오직 하나님 한 분뿐임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의 아픔을 위로해 주시고
공감해 주실 분이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임을
기억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지금 내가 처한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실 분이
오직 하나님 한 분 밖에 없음을 절대적으로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믿는 자의 다름 중에 한 가지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 믿는 자들은 행복할만한 이유가 있어서
소망을 가질만한 이유가 있어서 힘을 내어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비록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문제가 있을 지라도!
그리고 그 문제가 끝이 보이지 않을 지라도!
우리의 소망 되시는 하나님이 계시기에!
그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상황을 철저하게
인도해 가신다는 사실을 믿기에!
도저히 소망을 꿈꿀 수 없는 상황 속에서도!
다시 주님 앞에 설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주님께 부르짖을 수 있는 것입니다.
끊임없는 고통이!
끊임없는 문제가
종일 물 같이!
끊임없이 밀려오는 파도같이 우릴 덮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가 할 일은
그 모든 “종일”이라는 고통의 시간에 맞서
“매일” 주를 부르짖는 것입니다.
“주야”로 주를 찾는 것입니다.
“밤이 새도록” 주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럴 때! 차라리 죽는 것이 더 낫겠다고 생각했던
우리의 모든 아픔과 고통을 능히 이길 수 있는!
그 모든 낙심과 좌절을 다 잊게 하고도 남을
하나님의 평안함이 우리에게 임할 줄 믿습니다.